제41사찰 예천 용문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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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오주영 쪽지보내기 메일보내기 자기소개 아이디로 검색 전체게시물 댓글 0건 조회 10,558회 작성일 09-09-07 17:01본문
예천 용문사는 신라 870년(경문왕10) 고승 두운이 당나라에 다녀온 뒤 이곳에 암자를 짓고 두운암이라고 한 기록이 『신증동국여지승람』 예천군 산천조에 전한다. 두운(杜雲)선사는 풍기 희방사(喜方寺)를 창건한 신라 말기의 스님이다. 절 이름은 고려 태조가 신라를 정벌하러 남쪽으로 내려올 때 이 사찰을 찾다가 운무가 자욱하여 지척을 분간치 못하였다고 하는데, 이때 어디선가 청룡 두 마리가 나타나 길을 인도하였다 하여 용문사라 일컬었다고 한다. 고려 태조는 해마다 쌀 150석을 하사했고 1165년(의종) 왕명으로 중수가 이루어 졌으며, 그 뒤 1171년 고려 명종 때는 절의 왼쪽에 있는 봉우리에 세자(世子)의 태(胎)를 묻고 사액(寺額)을 '용문산 창기사(龍門山 昌期寺)'로 개명하였다.
현재 보광명전을 비롯하여 16동의 전각이 세워져 있는 규모로 보아 용문사는 예천읍에서 가장 큰 절이라 할 수 있다. 또한 오랜 사찰의 역사를 짐작할 수 있는 유물이 전하는 이 지역의 대표적인 고찰이며, 지금도 끊임없이 불사는 진행되고 있다. 특히 보물 제145호로 지정되어 있는 대장전은 이 지역 사람들이 자랑하는 문화재 가운데 하나이다.
고려시대에 수백 명의 승려가 상주하였고 여러 차례 외침을 당할 때마다 ‘일만승제 삼만승제(一萬勝祭三萬勝祭)’를 올려 국난 극복을 위해 기도했으며, 규정원으로 승병을 훈련하던 곳이기도 하다. 임진왜란 때엔 승군의 짚신을 짜서 보급하던 곳으로 호국불교의 장이기도 하다.
척불숭유의 정책을 폈던 조선시대에도 용문사는 왕실로부터 대접을 받아 1457(세조3)년에는 왕이 잡역을 감해주라는 명을 내렸는데 그 교지가 보물 제729호로 지정되어 전해오고 있다. 1478년(성종9)에는 소헌왕비의 태를, 1783년(정조7)에는 문효세자의 태를 안장했을 정도로 왕실과 밀접한 관계를 유지해 왔다.
관심을 두고 보셔야 할 것은 대장전, 윤장대, 목불좌상, 팔상탱화, 영산회괘불탱화, 자운루 등이 있다.
현재 보광명전을 비롯하여 16동의 전각이 세워져 있는 규모로 보아 용문사는 예천읍에서 가장 큰 절이라 할 수 있다. 또한 오랜 사찰의 역사를 짐작할 수 있는 유물이 전하는 이 지역의 대표적인 고찰이며, 지금도 끊임없이 불사는 진행되고 있다. 특히 보물 제145호로 지정되어 있는 대장전은 이 지역 사람들이 자랑하는 문화재 가운데 하나이다.
고려시대에 수백 명의 승려가 상주하였고 여러 차례 외침을 당할 때마다 ‘일만승제 삼만승제(一萬勝祭三萬勝祭)’를 올려 국난 극복을 위해 기도했으며, 규정원으로 승병을 훈련하던 곳이기도 하다. 임진왜란 때엔 승군의 짚신을 짜서 보급하던 곳으로 호국불교의 장이기도 하다.
척불숭유의 정책을 폈던 조선시대에도 용문사는 왕실로부터 대접을 받아 1457(세조3)년에는 왕이 잡역을 감해주라는 명을 내렸는데 그 교지가 보물 제729호로 지정되어 전해오고 있다. 1478년(성종9)에는 소헌왕비의 태를, 1783년(정조7)에는 문효세자의 태를 안장했을 정도로 왕실과 밀접한 관계를 유지해 왔다.
관심을 두고 보셔야 할 것은 대장전, 윤장대, 목불좌상, 팔상탱화, 영산회괘불탱화, 자운루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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